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뮌헨 협정 (문단 편집) === 뮌헨 협정 대신 전쟁이 곧바로 벌어졌다면? === 일부 역사학자들은 평화를 위한 것이 오히려 더 큰 전쟁을 불러온 예시로 만약 이 조약 없이 '''바로 독일을 손봐줬다면''' [[아돌프 히틀러]]도, [[홀로코스트]]도, 심지어는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수많은 죽음도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물론 [[체코슬로바키아]] 입장에서는 1년 먼저 시작된 비극이었을 뿐이지만.[* 덕분에 [[일찍 일어난 전쟁]]처럼 만약 뮌헨 협정이 결렬되었다면 하는 소재로 나온 [[대체역사물]]도 나온 적이 있다.] 간혹 이 '''바로 독일을 손봐줬다면'''이란 가정이 과연 현실성이 있는 가정이었는지는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다. 일례로 뮌헨 조약 이후 소련의 독촉으로 소영프 3국간 회담을 열었는데 이 자리는 소련이 독일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 동맹의 확답을 얻어내기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그 시점에서도 당장 동원 가능한 병력이 고작 '''4개 사단'''에 이마저도 '''완편사단은 고작 2개밖에 없다'''는 어이없는 대답으로 자폭하면서 영국의 전쟁 동원 능력의 현실을 드러내 보였으며 그리고 이런 서방의 대응에 열받은 소련은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화답했고 실제로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에도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 준비가 되지 않아서 [[가짜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독일에게 [[선전포고]]는 했지만 실제로는 병력과 장비 모두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근 8개월 간 전투가 전혀 벌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독일이 프랑스보다도 더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완전히 간과한 것이다. 당시 독일군이 가용한 병력은 불완전하게 준비된 36개 사단에 불과했고 이는 프랑스가 당장 운용 가능한 40개 사단과 영국의 4개 사단,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의 20개 사단에 한참 못 미치는 전력이었다. 이렇게 된 건 히틀러가 1차대전 당시 독일인들의 트라우마 때문에 독일 국민들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면서 군비를 증강해야 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군비지출이 많지 않아서였다. 독일이 전쟁을 수행해 볼 만하게 된 것은 60개 사단을 동원 가능해진 1939년 [[폴란드 침공]] 직전 시점이었고 그나마도 체코의 산업시설을 돌려서 생산한 게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리고 후일 150개 사단을 동원 가능하게 된 [[바르바로사 작전]]은 유럽 거의 전역을 수탈하여 얻은 막대한 자원과 산업기반, 노동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일례로 폴란드 침공은 물론 프랑스 전역에서도 체코제 35(t) 전차와 38(t) 전차[* 톤 단위의 무게라고 부연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이름 자체에 괄호가 포함된다. 실제로는 7톤짜리 경전차였고 보병전은 몰라도 기갑전 수행은 불가능한 물량 채우기용이었다.]는 독일 기갑사단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1938년 당시 군사력 균형은 아무리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영국과 프랑스가 훨씬 유리했으며 독일군은 1940년 프랑스 전역 직전이 되어서야 수적으로나마 프랑스군-영국군과 비슷한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도 독일 전차는 프랑스 전차보다 성능상 확고히 열등했다. 다만 전술적/작전적 영역에서 혁신적 기계화부대 운용을 성공시켰고 여기에 보태서 프랑스군이 전술적으로 너무나 무능한 모습을 보인 덕택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영프가 괜히 독일의 프로파간다에 겁을 내서 양보하기보다 단단히 각오하고서 1938년에 전쟁을 벌였으면 나중에 질 때 지더라도 최소한 1940년처럼 어이없는 패배는 없었을 수도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장 뮌헨 협정 시기 나치 독일의 탄약 재고는 불과 2주치였다. 그러나 1940년의 프랑스는 불타는 동유럽을 보며 진심으로 전쟁을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단기간에 박살나며 처칠이 할 말을 잃게 했기 때문에 당시에도 [[당나라 군대|전투력이 숫자에 비해 실속이 없었을 것이었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점은 당시 독일 군부가 [[오스터 음모|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심지어 비밀리에 영국측에 접근하여 히틀러의 요구를 거절할 것을 청원하기도 했다. 실제로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을시 이들이 쿠데타를 일으킬지, 또 일으키더라도 어떻게 전개될지는 알수는 없지만 설령 실패하더라도 작전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을 공산이 높다. 상당히 의외의 이야기지만 뮌헨 협정은 나치 독일에게 있어서 완벽한 외교적 승리가 될 수 있었다. 히틀러는 영-불 측이 안일한 이상주의에 빠져 있을 동안 그들을 이용해서 국력을 팽창시킬 수 있었고 뮌헨 협정은 그것의 대표격으로 볼 수 있다. [[헨리 키신저]]는 만약 히틀러가 뮌헨 협정 단계에서 팽창을 멈추고 영국과의 분쟁을 피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펼쳤다면 독일의 국력은 유럽의 그 누구도 막지 못할만큼 강대해졌을 것이라고 평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나치 독일이 영국과 프랑스를 능가하는 국력을 가졌던 것 자체는 사실이고 주변 독일계 주민들을 이용해서 소국들을 하나 둘 병합은 아니라도 친독성향으로 돌려놓고 있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유럽의 제1대국이 됐으리라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다만 그래봤자 독일은 몰라도 히틀러는 절대 그런 타협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일단 히틀러 본인이 국내 혼란에서 독일 국민의 눈을 돌리기 위해 저런 뻥카를 걸었는데 그만둔다고 하면 결국은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당장은 영토를 확장시킨 일로 권좌를 지킬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국내의 혼란을 히틀러의 능력으로 억누를 가능성은 없었을 테고 다른 사람에게 지위를 뺏겼을 것이 뻔하다. 또 그렇게 무난하게 성장했다면 결국 샌드위치가 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프랑스는 6주컷을 당하지 않고 평범하게 전선을 형성하기만 해도 독일과 1년 단위로 싸울 체급을 가졌고 폴란드라는 지역강국도 나는 독일이 싫어요를 외치는 중이며, 무엇보다 소련의 체급은 이미 넘사벽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었다. 유럽을 모조리 잡아먹은 독일이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에 소련군을 수백만 단위로 격파하고도 새로 뽑혀나오는 천수백만 인민 웨이브에 휩쓸렸는데 무난하게 성장한 독일이 전력의 반을 프랑스 국경에 배치했다면, 나날이 강해지던 소련군의 인민 웨이브를 얻어맞고서 이를 막고 막고 막다가 결국 베를린까지 밀렸을 가능성이 컸다. 뮌헨 협정은 나치 독일 최대의 외교 성과로 평가되지만 막상 히틀러는 패전 당시 뮌헨 협정을 자신의 최대 실수로 평가했다고 한다. 그는 패전을 앞두고 만약 1938년에 체코슬로바키아를 공격했다면 전쟁을 국지화할 수 있었을 것이며 영국과 프랑스는 정치적 자산이 무너진 채 소극적인 상태로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즉,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는데 성공하고, 몇 년 동안 세계 대전을 연기하면서 군사력을 강화시켰다면 독일은 전쟁에서 승리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이후 영프도 오류를 저질렀는데 1956년 [[수에즈 전쟁]]은 뮌헨 협정의 교훈을 너무 기계적으로 적용한 탓에 일어난 전쟁이었다. 영프는 이스라엘과 함께 저들 딴에는 '히틀러 같은 짓을 저지른' [[이집트]]를 침공했지만 소련의 핵 협박과 미국의 엄포에 수에즈 운하를 포기하면서 [[식민제국]]의 몰락만을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나세르도 권위주의적인 독재자였지만 히틀러에 비하면 그래도 선을 지켰던 사람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